SPECIAL ISSUE
01

산업기술 R&D 투자, 어떠한 돌파구가 필요한가?

글. 안준모
고려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응용화학부에서 공학사를,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기술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행정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학계로 옮기기 전에는 중소기업청, 교육과학기술부 등에서 공직 생활을 하며 다양한 기술 정책 수립에 관여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과학기술 혁신 정책, 인공지능 기반 정부, 디지털 전환, 기업가정신 등이다.
각국의 공격적 R&D 투자 전쟁
전 세계가 노골적이고 적극적인 산업기술정책 경쟁에 뛰어들면서, 가장 먼저 변화하고 있는 것은 적극적인 R&D(연구개발)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핵심역량(core competency)의 확보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체적인 R&D 확대가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피터슨 연구소는 ‘Scoring 50 Years of US Industrial Policy 1970-2020’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50년간의 산업정책을 평가하였다. 평가 기준은 산업 경쟁력 강화, 고용 창출, 기술 진보라는 세 가지였는데, 그림1과 같이 ‘R&D 투자’가 관세나 보조금 등 다른 정책 수단에 비해 월등히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핵심기술’의 확보가 국운을 결정하는 기정학(技政學; techpolitics) 시대에는 R&D투자가 더욱더 중요할 수 있다.


그림1 미국의 50년 동안의 산업정책 효과성 분석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최근 중국의 엄청난 R&D 투자이다. 미국이 반도체 장비를 중심으로 기술 통제를 실시하자, 중국 정부는 자국 기업에 막대한 R&D 자금을 지원하며 자체적인 핵심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례로, 미국의 견제를 가장 많이 받는 화웨이(HUAWEI)는 최근 10년간 약 213조 원을 R&D에 투자해 왔다. 2023년 한해에만 31조 5,466억 원을 투자했으며, 이는 화웨이 매출의 23.4%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다.
이러한 공격적 R&D 투자 덕분인지 중국은 자국의 목줄을 죄고있는, 이른바 ‘차보즈(卡脖子)’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중국과학원은 자국의 숨통을 죄는 미국의 35개 차보즈 기술을 발표한 바 있는데, 가장 중요한 기술로 반도체 분야의 광각기와 포토레지스트 기술이 꼽혔다. 이는 미국이 네덜란드를 압박해 포토리소그래피 장비업체인 ASML의 중국 수출을 통제했기 때문인데, 중국 정부는 엄청난 R&D 투자를 바탕으로 2024년 9월 자체적인 7nm 포토리소그래피 기술 양산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은 미국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인 R&D 투자로 국가의 산업 경쟁력을 한 단계 높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R&D 투자전략 방향은?
각국이 노골적인 산업정책을 통해 자국 기업의 핵심역량 확보에 힘쓰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R&D 투자는 어떠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2024년 정부가 R&D 예산을 삭감하면서 산업현장에 혼란이 야기된 바 있다. 이는 R&D 예산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누적된 비효율성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였지만, 그 방법이 거칠었고 접근방식도 세련되지 못했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속에 R&D 투자가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략이 필요하다.

1) 정치와 R&D 투자의 분리: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R&D 투자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글로벌 기술기업인 Boeing과 Intel은 최근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술기업의 근본인 R&D를 줄이고 원가절감에 집중하면서, 단기 재무제표는 좋아졌으나 기술적 우위를 후발 주자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즉, R&D 투자를 줄이면서 외부 충격에 대한 회복력(resilience)을 잃고 지속 가능한 성장 모멘텀이 희생되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북한으로 인해 반도 국가의 이점도 살리지 못하고 있어, 지정학적으로 비교열위에 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은 기술혁신에 대한 열정과 과감한 투자 덕분이었다. 최근 기술혁신 정책에도 정치적 이슈가 결부되면서, 원자력이나 친환 경에너지 같은 특정 기술 분야에 대한 R&D 삭감이나 급격한 정책 전환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R&D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정책 기조 유지’가 중요하다. 특히 정부 정책에 맞추어 R&D 포트폴리오를 설정한 민간기업이 급격한 정책 전환으로 손해를 보지 않도록, 신중하게 정책 기조를 설정하고 이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매년 정부 R&D 예산 최소 증가율을 설정하여 공표하거나 다년도 R&D 과제의 정부 지원을 보장하고, 대체 재원(예: 기술 보증을 통한 긴급 무이자 융자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2) 한국형 테마섹: 경직된 정부 주도 R&D 투자 방식을 민간 중심으로 혁신
현재 기술개발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여 기술은 물론 산업 간 융복합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R&D 투자는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에 머물러있다. 정부 회계연도에 따르는 출연금 집행이 대부분이며, 보조금(subsidy)이 아닌 출연금(grant)임에도 불구하고 보조금에 준하는 정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즉, R&D 자금이 R&D의 성격을 반영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경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자금이 풀리는 3월에 일제히 R&D과제가 시작되고, 연말에는 실적 관리를 위해 일제히 기술이전이 일어나는 촌극이 발생하고 있다.
R&D 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시각도 자금을 배분하는 정부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 혁신적인 투자관리 등이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존재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부 R&D 투자가 배분이 아닌 투자가 될 수 있도록, 정부는 투자만 하고 관리는 민간이 하는 이원화된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즉, 정부의 예산회계 운영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 정부와 민간이 함께 투자하고 시장 메커니즘이 R&D 투자를 결정할 수 있도록 완전히 새로운 R&D 투자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경직적인 국가 R&D 관리 체계에서 벗어나 민간이 창의적인 R&D를 주도할 수 있도록, 특수법인 형태의 R&D PPP(PublicPrivate Partnership)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싱가포르가 독립적인 투자 지주회사인 ‘테마섹’을 만들어 글로벌 투자를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그림2처럼 정부는 민간과 함께 재원을 투자하되 과도하게 간섭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며, 이사회를 통해 투자 포트폴리오를 선정하고 개별 R&D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구조다. 정부가 주도하는 top-down식 투자와 위계적인 관리시스템에서 벗어나, 기업이 주도하는 새로운 R&D 투자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림2 한국형 테마섹(R&D PPP) 개념


3) 첨단산업과 주력산업, 뿌리산업 간의 균형
양자, 바이오, 인공지능처럼 첨단 전략기술에 대한 투자는 매우 중요하다. 첨단산업은 미래 먹거리로서,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글로벌 비교우위를 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기술의 다른 한 축은 전통 제조업과 뿌리산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대부분의 매출과 부가가치, 일자리는 기존산업에서 창출되고 있다.
제조업계는 국가전략기술, 국가첨단전략기술 등에 R&D 투자가 집중되면서 제로섬(zero-sum) 게임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첨단 미래산업이 주력산업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에, 기존 제조업을 고도화하거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맞춤형 투자도 이루어져야 한다. 즉 기존의 주력산업, 뿌리산업에 대한 R&D 투자는 미래 첨단기술에 대한 투자와 결이 달라야 하는 것이다. 노후화된 장비에 대한 교체, 하드웨어 구매나 임차에 대한 지원이 중요하며, 산업 인공지능(Industrial AI)에 기반한 제조 프로세스 자동화·자율화·고도화도 이루어져야 한다.
엑사원(EXAONE)이라는 자체 인공지능(AI)을 활용하고 있는 LG가 좋은 사례다. LG 이노텍은 AI 비전 검사를 도입하여 리드타임을 80% 줄이고, 품질검사 인력 투입을 90%까지 줄였다. 또한 LG 화학은 Multi-agent 강화학습 기반의 스케줄링 최적화를 통해 납사(Naphtha) 생산 프로세스를 최적화한 바 있다.

4) R&D 투자 방식 다변화
기술혁신의 경로 복잡성, R&D의 높은 불확실성, 융복합 기술의 증가 등 변화를 맞이하여, 선진국은 정책 혼합(Policy mix) 기반의 기업 지원을 도입하고 있다. 이는 다양한 투자 방식을 포트폴리오로 구성하여, 기업의 복잡한 기술혁신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방법이다. 즉 출연금(grant), 조세지원(tax incentive), 융자(loan)를 R&D 성격에 따라 복합적으로 사용하여 정책 효과를 제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그림3). 관련 실증 연구들도 정책 혼합의 효과성을 실증하고 있다.


그림3 유럽투자은행(EIB)의 다양한 투자 방식 조합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경영 및 혁신 여건이 다양하고 재정 및 인적자원이 열위에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획일적인 지원보다는 기업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수요자 맞춤형 정책 혼합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술보증기금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 출연금과 조세지원만을 결합하는 다른 나라들보다 다양한 선택지를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림4와 같이 R&D 출연금을 기술 보증에 따른 융자나 조세지원과 결합하면 기업의 자체적인 투자를 견인하는 긍정적인 보완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반대로 R&D 출연금만을 지원한다면, 기업의 자체적인 투자를 구축(crowd-out)하는 부정적인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그림4 투자 방식 혼합의 정책 효과


5) 낡은 R&D 조세지원 제도 혁신
우리나라는 상당히 다양한 R&D 조세지원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연구 인력 개발비에 대한 세액공제’, ‘연구개발 관련 출연금 등의 과세특례’, ‘통합 투자세액공제’, ‘기술이전 및 기술 취득에 대한 과세특례’, ‘연구개발특구에 입주하는 첨단 기술기업 등에 대한 법인세 등의 감면’, ‘기술 혁신형 합병, 주식취득에 대한 세액공제’ 등 다양한 조세지원 항목이 있다.
그러나 실제 조세감면의 대부분은 1981년에 도입된 기업부설연구소 제도와 맞물린 ‘연구 인력 개발비에 대한 세액공제’와 신성장동력산업 투자와 연결된 ‘통합 투자세액공제’가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항목들은 존재하긴 하지만 실제 조세감면 금액이 상당히 미미한 실정이다. 이는 R&D 조세지원 제도에 변화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현재는 조세 당국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비 투자나 기업부설연구소 관련 R&D 투자만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세감면은 산학연 협력을 촉진하지 못한다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고, 융복합 신산업에도 적용할 수 없으므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기업이 산학연 프로젝트를 수행한 박사 학생을 학위 종료 후 6개월 내 고용하면, 기업이 투자한 학비 및 생활비를 R&D 연구개발 세액공제(인건비)로 소급 인정해 주는 제도를 도입할 수 있다. 기업이 국가가 지정한 기술 분야의 산학연 연구를 진행할 경우, 특정 조건(지원 기간, 인력 채용 등)을 충족하면 R&D 세액공제를 소급 적용하는 등의 인재 기반 R&D 조세지원 제도도 필요하다. 프로그램 개발 등 무형적 R&D도 폭넓게 인정되도록, 유연한 분류체계를 도입하여 제조업 대비 현저히 낮은 디지털 신산업 분야의 조세지원도 확대해야 한다. 융복합 기술이나 빠른 기술변화 등으로 즉각적인 판단이 필요한 첨단 분야에 대해서는, 우선 인정하고 추후 기준을 보완하는 ‘융복합 R&D 조세 샌드박스’ 제도의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

6) 정부 R&D 프로젝트 관리 방식에 대한 행정 혁신
R&D 투자뿐 아니라, 출연금이 기업에 전달되고 관리되는 방식도 혁신해야 한다. 이번 Special Issue를 준비하며 산기협이 실시한 산업계 의견 조사에서도, 이러한 혁신이 필요하다고 많은 기업이 답변했다. 최근 정부 부처들이 사업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사업 내에서라도 여러 시도를 할 수 있도록 R&D 과제를 통합하거나 대형화해야 한다. 강제적 산학연 컨소시엄 구성을 완화하고, 매출액이 아닌 기술에 기반한 기업평가를 도입하는 등 R&D 예산사업의 관리 방식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또한, 많은 응답 기업이 지적한 것처럼 과다한 제출 서류와 복잡한 행정절차도 문제이다. 이러한 행정부담은 특히 영세한 중소기업들에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면서, 브로커들이 개입하여 R&D 시장이 왜곡되는 문제까지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플랫폼 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는 ‘구비서류 제로화’, ‘맞춤형 혜택 알리미’ 등 데이터에 기반한 행정서비스가 R&D 투자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행정부담 때문에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들이 R&D 투자에서 소외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